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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안정성의 관점으로 본,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 한나 슈미츠는 무죄인가 유죄인가? [법적 안정성의 예외]

proqk 2022. 10. 5.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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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안정성 대한 이야기를 먼저 보고 오는 것이 좋다. 

 

결과가 불만인 사람들이 엄청 많음에도 왜 법대로만 해야 하나? [법적 안정성이란?]

https://foxtrotin.tistory.com/567

 

결과가 불만인 사람들이 엄청 많음에도 왜 법대로만 해야 하나? [법적 안정성이란?]

이 글은 배종대, 홍영기 저, <형사정책>의 내용을 제가 이해한 대로 정리하고, 정리하면서 들었던 질문에 대해 스스로 대답한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아니 저xx 지은 죄가 얼만데 왜 징역 몇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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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안정성은 가까운 정의를 훼손시키더라도 절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사안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전쟁범죄, 대량학살, 권력형 범죄 등이다. 공소시효에 대한 법률을 그대로 관철하려다보니 과거에 저질러진 저런 범죄를 처벌할 수 없는 경우가 생겼다. 대한민국에서는 친일파 처벌 문제,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불법행위 등이 있고, 독일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정권이 행한 불법행위 등이 있다. 

 

이전 글에서 말했는데 법이념 세 가지는 항상 대립하기 때문에 우위관계에 따른 조절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범죄의 경우, 법적 안정성과 정의의 대립이 한계에 이르게 된다. 법적으로 하기에는 사람들의 반발이 너무나도 거세고, 과거의 잘못을 청산해야 하는 입장을 극한으로 마주한 상황이다. 이 때 적용할 수 있는 것이 라드브루흐의 공식이다. 라드브루흐의 공식에 따르면 실정법은 그 내용이 정의롭지 못하고 합목적성이 없는 경우에도 일단 우선권을 갖는다. 그러나 실정법률과 정의의 모순이 참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면 그 부정당한 법보다 정의가 우선이 된다. 

 

쉽게 말하면, 항상 정의<법적 안정성인데, 법대로 하기에 그 범죄가 너무 크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순이라고 주장할 때에 한해 정의>법적 안정성이 된다는 말이다. 사실 이것은 엄청 충격적인 공식이다. 정의를 앞세워 법적 안정성을 후퇴시키는 처리를 하는 행위다. 그래서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만 있을 수 있으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범죄사안의 해결방식은 아니다.

 


 

이렇게 법적 안정성과 그 예외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자.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논쟁이자 핵심 주제인 다음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하겠다.

 

한나 슈미츠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한나 슈미츠는 문맹이다. 문맹인 것을 들키지 않으면서 일을 할 수 있는 경비원에 지원했다. 하지만 이 경비 업무는 단순한 경비가 아니고, 나치 정권에서의 강제수용소의 경비였다. 수용자들을 관리/감독하고, 새로운 수용자가 들어와서 자리가 부족해질 때마다 주기적으로 몇 명의 인원을 선별하여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보냈다. 한나 슈미츠는 글을 몰라서 공문서를 읽을 수 없어 자기가 하는 일이 사람을 해하는 일인지 몰랐다. 그저 자기 할 일을 충실히 할 뿐인 사람이었다.

또한 패전이 임박했을 때 수용자들을 호송하면서 교회에 가둬두었다. 그런데 그 교회에 폭탄이 떨어져서 불이 났다. 수용자들은 빠져나오려고 하나뿐인 문으로 몰렸다. 하지만 한나 슈미츠는 끝까지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생존자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교회 안에 갇혀서 불타버렸다.

...이런 비인간적인 범죄를 바라보는 독일 법학도들의 시각은 단호하다. “유죄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또 천태만상의 강제수용소 감시원들과 앞잡이들에 대한 유죄판결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확실했다. 그들을 이용했거나, 그들의 행위를 막지 못했거나, 1945년 이후 그들을 추방할 수 있었음에도 추방하지 못한 세대가 법정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혐의를 조사했고, 밝은 태양 아래 재판을 받도록 했으며, 그 세대에게 수치라는 판결을 내렸다. http://h21.hani.co.kr/arti/PRINT/26504.html

 

나는 이 영화를 사회학개론 수업에서 보았다. 그리고 팀별로 위의 질문을 가지고 토론을 했다. 

 

한나 슈미츠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사회학개론 수업을 듣는 많은 학생들이 한나 슈미츠는 유죄라는 의견에 동의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다음은 우리 조에서 나온 여러 의견이다.

 

-한나 슈미츠의 죄는 문맹과 무지로 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죄 자체가 없어지지 않는다. 사람을 해하였다는 결과는 확실하게 일어난 일이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악이 될 수도 있다는 개념이 있다. 적어도 생명의 존엄성을 느끼고 있었다면, 사회에서 접하는 일을 계속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했어야 한다.

-불이 났을 때 문을 열어주지 않은 행동 등, 개인의 판단으로 규율보다 우선시 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도덕적 행위를 하지 않은 측면에서 죄가 있다.
-죄가 있기는 하지만, 무지해서 죄를 지은 것과 알고도 죄를 지은 것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 요즘 법에도 자기가 알고 살인을 했는지, 모르고 살인을 했는지도 굉장히 중요한 점이다. 본인이 맡은 그 일의 진실을 인지하지 못 했고, 외부의 압박이 있었다는 점을 참작하여 죄의 경중을 따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법적 안정성의 관점으로, 한나 슈미츠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여기까지는 학생들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서 법적 안정성으로 따진다면, 한나 슈미츠는 무죄다. 사실, 무죄이기 전에 법의 역할을 오해하고 있다. 한나 슈미츠, 또는 그 나치 정권시절에 사람들을 쏜 말단 군인들, 나치 관련한 시설에서 일단 단순 근로자들 등등.. 이 사람들을 과연 전범이라고 할 수 있나? 양심, 도덕 이런 것을 제외하고, 오히려 그들의 행동은 그 시절의 법으로 따져보면 합법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같은 행동이 불법이 되었을 때, 현재의 법으로 과거의 행동을 처벌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법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법적 처리는 애매해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처벌되었다. 지금도 나치와 관련된 증거가 나오면 비틀비틀한 노인까지도 처벌을 받는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1995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공소시효가 만료된 사건임에도 특별법이 제정되며 소급입법되며 구속되었다. 사실 원칙적으로는 진정소급입법은 금지된다. 사안이 심각하다고 하나둘 예외를 두다 보면 법적 안정성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특별법의 경우 사안의 특수성으로 인해 합헌이 되었다. 라드브루흐의 공식에서 '정의의 모순이 참을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면 정의가 우선이 된다'의 경우인 것이다. 헌법재판소에서 지금까지 심사해 온 수많은 진정소급입법 관련 사건 중에 단 두 개만 합헌인데, 이 때 제정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고, 하나는 친일파 재산 환수 특별법이다.

 

엄밀히 하면 라드브루흐의 공식이 적용될 정도의 상황은, 형식적으로는 법적 처리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정치적 처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법적 처리라고 한다면 법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사안이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 사안이 이미 발생했고, 그것을 처벌하기 위해 법이 만들어졌다. 원래라면 실정성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정의를 위해서 특별하게 적용되었고, 그래서 정치적으로 처리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사회학의 관점으로, 한나 슈미츠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그럼 이 질문을 사회학적으로 생각해 본다. 유죄인지 무죄인지는 헌법의 처리에 맡기고, 단지 자기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 한나 슈미츠가 왜 범죄자가 되어야만 했는가 그 배경을 생각해 본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개인은 구조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2. 구조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어느 정도까지 물을 수 있는 것인가?  

한나 슈미츠는 그저 열심히 일했는데 범죄자가 된 것은, 그런 시대였다는 구조적인 배경이 있었다. 한나 슈미츠는 그런 구조, 그런 사회에서 죄를 짓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할 수 있었을까? 그러면 개인은 구조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한나 슈미츠가 직업을 선택할 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문맹인 한나 슈미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한나는 매 순간에 최선의 선택을 했다. 그래도 만약에 한나 슈미츠가 경비의 업무가 그렇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다른 일을 선택해지 않았지 않을까 한다. 이는 영화 끝에서 글을 배우고 자살을 하는 모습에서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조직에 속한 개인에게 강압적이지만 부당한 일이 주어진다면,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사실 몇 가지 없다. 순응하고 하던가, 일 자체를 그만두던가, 외부에 알리던가.. 그 정도일 것이다. 결국, 개인은 구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면 개인에게 구조에 대한 책임을 어느 정도 물어야 하는가? 이상적으로는 모두에게 책임을 지어야 한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를 책임으로 생각할 것인가? 방관도 죄라면 과연 죄가 없는 사람이 있긴 한가? 

 

개개인이 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모두가 같은 권력과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을 물으는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나도 구조를 바꿀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을 수록 더 크게 책임을 지는 기준이 좋다고 생각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단어가 있다. 악의 평범성은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 학살은 악이다. 하지만 한나 슈미츠처럼, 개개인을 보면 완전한 악이 아닐 수 있다.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개인들이 모여서 큰 악이 생길 수 있다. 이를 구조악이라고 말한다. 구조악이 사라지려면 각 개인의 성찰이 필요하다.
한나 슈미츠를 예로 들어 본다. 한나 슈미츠는 주어진 일과 역할을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성실하더라도 비판적인 사고가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악을 재생산하는 데 도움이 되어 비극이 일어났다. 개인은 구조에 영향을 받고 종속적이다. 하지만 구조를 유지하고 생산하는 것도 개인이며,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도 개인들이 모인 힘이다. 우리는
계속 구조에 대해서 성찰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보자. 1번 질문에 대해서는 개인은 구조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나의 대답이다. 2번 질문을 한나 슈미츠로 생각해 보면, 한나 슈미츠는 과연 얼마나 책임져야 하나? 한나 슈미츠는 구조를 바꿀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책임이 있고, 행동에 대한 처벌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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